2014년 9월 23일 화요일

철학자와 하녀

철학자와 하녀고병권씨의 책은 '마이너'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수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즐겁게' 받아들여야함을 조용히 말한다. 현대의 사회가 공동체적 질서라는 미명하에 소수를 억압하는 형태를 가짐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히려 그러한 '소수자'가 됨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정말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우리가 정말 '민주주의'사회에 살고 있다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1. 나무가 없으면 방법이 없다. 잡아먹으라고 하는 수밖에. 하지만 호랑이를 한 번 물어도 괜찮을 것이다. <루쉰>- 루쉰의 기질과 정말 잘 맞는 말이다. 억지스럽지 않지만 순응하지만은 않는 조용하지만 기개가 느껴지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순응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바뀌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또한 불이익을 받는다. 어찌할 것인가.
  2. 세간의 번뇌는 활활 타는 불과 같으니, 그 불길이 어느 때 멈추겠습니까. 시끄러운 곳에서 바로 공부하는 일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남송시대 대혜스님>- 공부에는 때와 장소가 없다. 맞는 말씀이다. 해야하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3. 비트겐슈타인의 대단한 점은 완벽한 '건축물'이라는 <논고>를 아무 거리낌없이 부수어버렸다는데에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남의 장점을 흡수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언제나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일 것이기 때문이다.
  4. 마르크스가 지향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많은 재화를 가진 사회라기 보다는 자본주의보다 사물에 대하여 더 다양한 감성을 생산하는 사회, 사물에 대해 더 다양한 척도를 가진 사회였는지 모르겠다.
    - 사물을 객관화하지 않고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이야기일텐데 그렇다면 소유를 추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 모든 재화와의 관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인간은 너무나도 작은 그릇일 터이니 말이다.
  5. '신'은 생의 반대 개념이며 해롭고 유독한 개념입니다. 영혼이나 정신, 불명의 영혼이라는 개념은 신체를 경멸하는 것이고 또 병들게 하지요. 그것은 생에 있어 중요한 많은 것들, 가령 영양, 주거, 정신적인 식사, 질병의 치료, 청결, 기후 등의 문제를 섬뜩할 정도로 경솔히 다룹니다.<니체>
  6. 고대 금욕주의를 끌어들인 것은 욕망을 줄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삶을 욕망하라는 것이었다.
    - 자본주의가 욕심이 많아 문제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삶을 욕망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리라. 우리의 삶의 가치를 단순히 GDP에만 두면 안된다는 이야기이리라.
  7. 잘못을 좀 잊읍시다. 양심이 둔해서가 아니라, 날카로우면서도 잊는 겁니다.<함석헌>
  8.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방랑하는 자들이 되어라' <도마복음 42절>
    - 예수님은 태생부터 유목인이었나보다. 어딘가에 속하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함을 강조하신다. 이상하게 다수에 속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이 또한 현대인의 문제인 것같다.
  9. 서양인은 임종 때에 곧잘 의식 같은 것을 행하여 타인의 용서를 빌고 자기도 타인을 용서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말한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루쉰>
    - 참으로 솔직한 표현이다. 좋은게 좋은것이 아니다. 아닌것은 아닌 것이다.
  10. 문제는 법질서에 대한 강조가 시장 자체의 실패에서 파생하는 여러 사회적 문제를 공안의 시각에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데 있다.
    - 국가, 공동체 등 어떠한 단체를 강조하는 관점은 필히 폭력적일 수밖에 없나보다. 그 밖에 있는 소수자나 다른 생각을 가지는 사람에 대한 허용은 절대 없다.
  11. 건전한 가치관을 지닌 시민을 육성하겠다는 것은 대체로 지배질서를 재생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다.
    - 다수에 의한 폭력의 다름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형태의 집단 교육은 정말 고민할 부분이 많다.
  12. 예수를 믿는 사람, 그 믿음을 과시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처럼 사는 사람은 드물다.
    - 장자에 나오는 말과 유사하다. 성현의 말씀을 읽는 것은 죽은 것도 다름없다. 껍데기를 받아들이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말씀'들은 우주로 흩어지는 것이 대다수인가 보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철한간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아무 생각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어쩌면 편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아깝다. 그리고 깨어있어야 더욱 재밌다. 철학이 필요한 밤이다.

2014년 9월 19일 금요일

조심 : 조심하라, 마음을 놓친 허깨비 인생!

정민교수님의 책은 왠만하면 챙겨본다. 좋아하는 인물인 정약용의 다양한 책을 쓰셨기 때문도 있지만 다소 고지식해보이지만 원론적으로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글을 많이 쓰셨서 느끼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이 책도 ‘일침’과 비슷한 느낌의 책으로 수필형식으로 하나의 주제아래 길지 않은 글이 이어져 있는 책이다. 자기계발서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정민교수님의 책은 그렇게 분류하고 싶지는 않다.


  1. 마음에 드는 곳은 오래 마음에 두지 말고,
    뜻에 맞는 장소는 두 번 가지 말라.
  2. 천재가 꾸준한 노력을 못 이긴다. 대기만성이 맞는 얘기다.
  3. 주자는 늘 눈병을 앓았다. 말년에 어떤 학자에게 준 편지에게 “좀 더 일찍 눈이 멀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고 썼다. 눈을 감고 지내자 마음이 안정되고 전일해져서 지켜 보존하는 공부에 큰 도움이 됨을 느꼈던 것이다.
  4. 말을 많이 해서 이득을 얻음은
    침묵하여 해가 없음만 못하다.
  5. 추연가슬은 예쁠 때는 제 무릎 위에라도 앚힐 듯 살뜰하게 굴다가 내칠 때는 깊은 연못에 밀어 넣듯 뒤도 안 돌아본다는 의미다. 사람을 쓸 때 애증이 죽 끓듯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가리키는 뜻으로 쓴다.
    무릎 위에 낮는 것을 기뻐할 일도 아니다. 언제 못에 빠질지 알 수가 없다.
  6. 사람 사는 세상의 온갖 경우가 어찌 일정하겠는가?
    한 걸음 앞서 생각하면 끝날 때가 없고,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하면 절로 남는 즐거움이 있다.
  7. 이원익은 속일 수 있지만 차마 못 속이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8. 걸작은 일기가성으로 단숨에 쓴 글이 아니다.
  9. 그대가 진실고 3년간 독서하면 반드시 천 사람의 위가 될 것이요, 5년간 독서하면 만 사람의 위가 될 것이다. 10년간 독서하면 반드시 더 높은 사람이 없게 되리라.
  10. 군자가 본래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지가 없는데도 남이 알아주는 것은 싫어한다.

2014년 9월 18일 목요일

Kyle Hendricks

<느리니 칠만해 보이지?>

Kyle Hendricks, 1989, R/R, CHC

8월 내셔널리그 신인으로 뽑인 컵스의 기대주 헨드릭스입니다. 컵스는 올해도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결국 팀의 중심을 잡아주던 투수들인 Samardzija와 Hammel을 Oak로 넘기면서 팀을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2013년 컵스의 올해의 마이너선수로 뽑혔던 Hendricks를 콜업했습니다.


2011년부터 마이너리그에서 2점대 방어율과 뛰어난 WHIP을 기록하고 있었는데요 메이저에서도 돋보이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삼진이 많은 선수는 아니지만 볼넷이 적고 뛰어난 커브와 체인지업으로 승부를 보고 있습니다. 커터와 커브가 비슷한 속도를 내며 반대의 궤적을 만들면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직구구속이 90마일이 안된다는 점에서 1선발 스터프로 보이지는 않지만 현재 Arrieta가 극강의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볼 때 견고한 2-3선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7회 이상을 소화해주는 모습을 볼 때 팀에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시즌에 꼭 필요한 선수라고 하겠습니다.

당쟁사 이야기

당쟁은 조선시대정치의 특징이라고 인식되어진다. 이를 일제식민사관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많지만 당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당쟁은 정상적인 정치활동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동서인이 분리된 선조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이에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조선이 거의 파탄직전까지 몰린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동인과 서인들은 이에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게 상대방을 헐뜯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결국 상대에 대한 적대는 피바람을 몰고오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의 등쌀에 역대 왕들은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경종독살설이 유포된 것,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것, 정조가 급서한 것, 효명세자나 현종이 본인의 목소리를 낸 직후 세상을 떠난 것 등 권력을 위해서 민생안정은 전혀 돌보지 않은 당쟁의 부작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예송의 대표적 주자였던 송시열과 윤휴의 경우만 봐도 이들의 학문적 성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인간적인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한문적 도덕적 우러름을 받은 것은 공통적이다. 이에 비해 현재의 정치는 이러한 최소한의 도덕성도 결여되어 있다. 심지어 탄핵을 받았을 경우 조선시대 관리들은 형식적이라고 하더라도 본인의 부덕함을 이유로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음에 비해 요즘은 ‘너희들이 뭐를 알겠느냐’하며 무시하는 것이 기본이며 심지어는 국민들의 자질을 폄하하는 것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당쟁의 배경이 된 사림정치의 큰 특징은 당하통청권 및 한림회천권과 같은 인사권의 분배이다. 국왕이 중심인 사회에서 국왕을 제외하고 신하들이 인사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보통 견제장치가 아니다. 또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으로 대표되는 언론3사의 경우 감주의 지휘를 받았음을 볼 때 시스템적으로는 상당한 견제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집권당의 대표가 대통령이 될 경우 사법부에 대한 인사권도 행사할 수 있음을 볼 때 시스템적으로 결코 과거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으며 현재 정치인들은 최소한의 염치도 없음을 볼 때 과연 현재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당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한가지 새롭게 안 사실은 중국 사신에 대해서 뇌물을 주는 관습이 광해군때에 생겼다는 것이다. 이는 명청교체기에 당위성만으로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뇌물이 일상화된 것이 이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닌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