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이라고 하면 프로이트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융은 이를 본받은 후학자정도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융이 프로이트를 처음에 지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모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오히려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하면서 자신을 세웠던 사람이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무의식’의 깊이나 넓이가 훨씬 크다는 것은 두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을 개인의 경험에 한정짓는 것이 프로이트라면 ‘융’은 개인적인 경험이 아닌 집단의 경험을 제시한다. 이는 어쩌면 전 세계의 신화가 공통적으로 홍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인류는 보다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융의 치료법은 훨씬 자연스럽다. 프로이트가 전능한 입장의 의사로서 환자를 분석한다면 융은 단순히 옆에서 조언을 해주는 경우에 불과하다. 장자에서 나오는 애태타의 경우처럼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다랄까. 그러나 이러한 치료법을 만든 융이 꽤나 ‘비’사교적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새로워지는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무의식에는 너무나도 많은 원형이 있다. 이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불러올리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나’임을 볼 때 여러가지 원형이 의식의 나와 섞이어 또 다른 내가 된다는 융의 설명은 항상 깨어있어야함의 다른 말이 아닐까 싶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